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훙치허 전투 (문단 편집) == 일본군은 얼마나 전사했는가? == 훙치허 전투의 결과는 관동군 헌병대 자료에도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토벌대의 사상자 규모에 대해서는 숫자가 조금 적기는 하나 대체로 인정했고 현지 주민의 동요 조짐을 보인다고 전했다. 당시 관동군 현병대 측에서 보고한 자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비 주력 150명은 안투 현을 유동중이던 3월 11일 훙치허 삼림경찰대 본부를 습격했다. 현금 1만 1000여 원 및 의복, 식량 다수를 약탈하고 화약고를 폭파하고 주민 145명을 납치해 도주했다. 이 비를 추적 중인 마에다 경찰토벌대는 3월 25일 안투 현 다마루거우 서북방 지구에서 조우, 교전을 두 시간여 하고 이것을 궤주시켰으나, 이 전투에 의해 아빙 전사는 대장 마에다 경정 이하 55명, 부상 26명을 내는 등 그 여세를 경시하기 어렵고 더욱더 경계를 요하는 현상이다. 비습지 부근 주민은 약간 불안 동요의 조짐 있어 헌병은 유언 단속, 민심 선무에 노력하고 있다. >---- >1940년 3월 사상대책월보 일본 경찰 자료에 따르면 최소 50명 이상의 전사자가 속출했으며 사상자까지 합치면 최소 7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간도 경찰대 본부장의 보고서에 따르면 유격대 측의 전사자는 31명인데 반해 토벌대측의 전사자는 59명, 행방불명 9명, 전상자 27명이다.[* 서대숙 교수는 이 일본군 자료를 토대로 이만큼의 사상자가 나왔고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250명이 마에다 부대 150명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다른 50명이 무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 당시 김일성이 이끌던 동북항일연군의 대원으로 이 전투에 참전했던 유옥천[* 이후에도 중국에서 거주했다고 하며 1990년대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은 마에다 부대의 140명 중에서 단 한 사람만이 살아남았고 소총 100자루와 기관총 6자루를 획득하였다고 회고했다. 또 동북항일연군측 손실로는 정치부 주임 여백기 등이 부상당했다고도 말했다. 이런 자료를 토대로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포함하여 많은 북한측 자료들은 140명의 일본 경찰이 전사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연구한 와다 하루끼는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에서 당시 일본군 관계자의 말로는 마에다 부대에서 살아남은 자는 대략 20명 정도라고 하며 일본 측 문헌에 나온 50명 정도 생존은 생존해 있던 이들의 증언과 어긋난다며 대략 120명 이상의 일본군이 전사한 것으로 봤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훙치허 전투에서의 일본 경찰의 전사자 숫자는 대체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